[혁신레터] 목민심서로 읽는 지방선거 ⑧ — 재난 앞의 목민관
지방자치혁신뉴스에 연재된 하종삼 대표의 「목민심서로 읽는 지방선거」 ⑧편을 보내드립니다. 재난과 흉년 앞에서 목민관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산의 진황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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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전 재난 대응 매뉴얼이 오늘 지방정부에 주는 교훈
하늘이 노했다는 것의 진짜 의미 —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의 재해석
조선시대, 가뭄이 들면 임금은 반찬을 줄였다. 수라상의 반찬 수를 줄이는 이 감선(減膳)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었다. 수해가 나고 전염병이 돌면 왕은 직접 자기 자신에게 죄를 돌리는 죄기(罪己)의 교서를 내렸다. "이 모든 재난은 과인의 부덕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스스로 고하고, 신하들에게 직언을 구하는 구언(求言)을 공식 선포했다. 이것이 이른바 천명사상(天命思想) 혹은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 임금이 하늘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린다는 성리학적 사상의 실제 작동 방식이었다.
현대의 눈으로 보면 비과학적이다. 기우제를 《경국대전》 예전(禮典)에 법으로 명시한 것도 황당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상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면이 보인다. 자연재해의 책임을 지배층이 지게 하는 구조, 그것이 천인감응설이 수행한 핵심 기능이었다. 재난이 발생하면 모든 책임은 위로 향했다. 임금에게, 수령에게. 그 결과는 하늘에 닿은 백성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한 사면(赦免), 면세(免稅), 감세(減稅), 즉 사회적 약자가 실질적 혜택을 입는 조치들이었다.
같은 시기 유럽의 재난 인식은 정반대 방향을 향했다. 흑사병이 돌고 흉작이 들면 신의 징벌이자 악마와 결탁한 마녀들의 저주라는 프레임이 작동했다. 책임은 아래로 향했다. 가장 방어력 없는 약자인 여성, 독거 노인, 과부, 이단자들이 희생양이 되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며 6천 명 이상의 조선인이 학살된 것도 같은 메커니즘이었다.
비과학적 외피, 국가책임의 내용
천인감응설은 비과학적 외피를 둘렀지만, 그 내용은 오늘날의 언어로 말하면 재난에 대한 국가책임 원칙이었다. 재난은 국가의 실패이고, 따라서 국가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조선 재난 행정의 철학적 출발점이었다.
법으로 새긴 재난 대응 시스템 — 육전(六典)에 흩어진 재난 조항
조선이 특별한 이유는 이 책임 의식이 선언에 머물지 않고 법전에 새겨졌다는 데 있다.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 육전(六典) 전체가 재난 관련 조항을 담고 있었다.
호전(戶典)에는 진휼(賑恤) 규정과 환곡(還穀) 제도, 재해 시 감세 절차가 명시되었다. 형전(刑典)은 역질 사망자 수습 의무와 시신 방치 금지를 규정했다. 예전(禮典)에는 기우제와 기청제가 국가 의례로 법제화되었다. 공전(工典)은 제방과 보(洑)의 축조 및 유지 의무를 법으로 명시했다. 심지어 이전(吏典)에는 재난 허위보고에 대한 처벌 규정이 있었다.
동시대 유럽은 군주의 재량과 교회의 자선에 의존했다. 중국에도 재난 관리 시스템이 존재했지만 조선만큼 세밀한 구조는 아니었다. 조선만이 재난 대응 절차를 법전에 체계적으로 명시했다. 재난 대응이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국가와 지방관의 법적 의무였다는 것, 이것이 조선 재난 행정의 두 번째 특징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은 기근(飢饉)과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 수, 유민(流民) 규모를 구체적 숫자로 기록했다. 구휼 곡식 지급량과 진제장 운영 일수까지 문서화했다. 동시대 유럽에서는 흑사병 사망자 수조차 후대 역사가들의 추정치다. 조선은 기록했다. 기록한다는 것은 책임진다는 것이며, 다음에 개선한다는 것이다. 백성의 피해를 정책 결정의 핵심 데이터로 취급한 지구상의 거의 유일한 나라였다.
재해를 조세에 새기다 — 전분육등·연분구등의 자동 감면 제도
조선 재난 행정의 구조적 핵심은 조세 시스템 안에 있었다. 세종 26년(1444년) 확정된 공법(貢法)이 그것이다.
전분육등(田分六等)은 토지 비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 분류해 기준 수확량을 설정했다. 연분구등(年分九等)은 매년 그 해의 풍흉(豊凶)을 상상(上上)에서 하하(下下)까지 9등급으로 평가해 세금을 조정했다. 수재·한재·충해가 발생하면 등급이 하향되어 세금이 자동으로 감면되었다. 피해 면적 비율에 따른 부분 감면 규정까지 세분화되었다.
이 제도가 탄생하기까지는 20년의 논의가 필요했다. 세종은 1430년 17만 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세계 최초 수준의 조세 개혁 공론화 과정이었다. 영국이 납세 능력에 따라 소득세를 도입한 것은 1799년의 일이다. 조선은 이미 1444년에 재해 피해에 연동된 자동 감면 제도를 법제화했다. 355년의 차이다.
재난 회복력을 세금 구조에 내장하다
전분육등·연분구등은 단순한 조세 제도가 아니었다. 재난 회복력을 세금 구조에 내장한 장치였다. 조선에서는 극심한 흉년에도 중국과 유럽에서처럼 대규모 농민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중국의 홍건적의 난과 이자성의 난, 프랑스의 빵 약탈과 대혁명은 모두 굶주림이 체제를 전복시킨 사례들이다. 조선은 재난 감면 제도의 법제화, 상설 구휼 기관의 가동, 기록에 기반한 투명 행정이라는 세 가지 안전 장치로 내란의 임계점을 낮게 유지했다.
진황(賑荒) : 고과에 넣지 않은 이유 — 다산의 역설적 설계
다산은 《목민심서》를 12편 72조로 구성했다. 이 중 수령의 고과평가, 즉 《경세유표》의 고적지법(考績之法)에 포함된 것은 54개 조항이다. 처음의 부임(赴任), 마지막의 해관(解官), 그리고 제11편 진황(賑荒) 이 세 편은 54조에서 제외되었다.
왜 진황편은 고과 항목이 아닌가. 다산은 직접 그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목민심서》 전편을 통해 읽어내면 답은 분명하다. 진황은 국가와 수령이 제 역할을 못해 백성이 굶주리는 지경에 이른, 이미 실패한 상황에서의 대처다. 잘잘못을 평가하는 고과 항목에 진황을 넣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진황의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 자체가 행정의 실패라는 다산 인식의 반영이다.
구조적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본업이다
재난 구휼을 잘 했다고 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재난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수령 본연의 임무라는 것. 진황은 부임(赴任)처럼 수령의 기본 자세의 문제이고, 해관(解官)처럼 마무리의 문제다. 일상적 행정의 성과 지표가 될 수 없는 영역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다산은 진황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정밀하고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진황편 6조(비자·권분·규모·설시·보력·준사)에는 구호 물자 확보부터 배급 방식, 부정 방지, 사후 정리까지 현대의 재난 매뉴얼과 다를 바 없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다산의 진황론 — 공의(公議)로 운영된 재난 행정
다산이 진황편에서 제시한 원칙의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 철저한 사전 준비. 둘째, 백성의 의견 수렴과 공의(公議)에 의한 집행.
비자(備資), 즉 자원의 사전 비축에 대해 다산은 풍년이 든 해에 곡식이 쌀 때 미리 사들이고, 아전들이 훔쳐 먹어 텅 빈 관창(官倉)을 보충해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경신대기근(1670~71년) 때 청풍 부사 홍처량(洪處亮)의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세입이 적은 궁벽한 고을에서 3년간 절약해 비축한 곡식 수천 곡(斛)이, 인구의 10분의 1을 앗아간 사상 최악의 재해를 온 경내가 이겨낼 수 있게 했다.
구호 대상자를 선정하는 방식도 주목할 만하다. 다산은 풍족한 집(饒戶)을 선정할 때나 굶주린 집(飢戶)을 선정할 때 모두 공의(公議)를 통하도록 설계했다. 평소 관아를 드나들며 아첨하는 자들을 배제하고, 조용히 농사짓고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 대표자를 뽑아 의견을 수렴하게 했다. 세 가지 문건, 즉 비밀리에 상족(上族)과 중족(中族)에게 받은 문건 각각 하나씩과 공개 공론 문건 하나를 대조하고, 수령이 직접 마을 실태를 기록한 침기표(砧基表)까지 대조했다.
주민 참여형 복지 행정의 200년 전 설계도
이 절차는 오늘날의 언어로 말하면 주민 참여형 복지 행정이다. 아전의 농간을 차단하고, 형식적 형평성이 아닌 실질적 필요에 따른 배분을 실현하기 위해 다산이 설계한 공론 구조였다. 가난한 선비와 궁한 백성으로 온 집안이 어려우면 한 집에 열 식구를 모두 기록해도 되고, 부촌의 요호는 한 동리 백 식구를 통째로 뺀다 해도 된다는 것이 다산의 원칙이었다. 형식적 평등이 아닌 실질적 필요에 따른 배분.
뉴딜 정책의 원형 — 흉년에 토목공사를 실시하라
진황편 보력(補力) 조에는 현대 경제학의 언어로 말하면 적극재정론의 원형이 담겨 있다.
"봄철 날이 길어지면 공사를 일으킬 수 있으니, 관사(官舍)가 허물어져 고쳐야 할 것은 이때에 수리해야 한다."
— 《목민심서》 진황(賑荒) 보력(補力)
다산이 흉년 대책을 다루는 진황편에 이 내용을 넣은 것은 의도적이었다. 공전(工典) 선해(繕廨) 조에 넣지 않고 굳이 진황편에 포함시킨 이유가 있다. 다산은 송나라 진정중(陳正仲)의 말을 빌려 이렇게 설명한다. 흉년에 대규모 공사를 일으키면 부잣집의 돈이 공사 인건비로 풀려 빈궁한 자들에게 흩어진다. 소민(小民)들은 이에 의해 먹을 것을 얻는다.
주자(朱子)가 절동(浙東) 기근 때 조정에 올린 청원도 같은 논리다.
"창고를 열어 진휼하는 비용에서 조금만 보태면 백성을 모집해 수리(水利) 공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재민을 구제하고 수리를 일으키는 데 한 번에 두 가지 일이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 주자, 절동 기근 청원문
이것이 루스벨트가 1930년대 대공황에서 실행한 뉴딜정책의 핵심 논리다. 정부가 재정을 투입해 일자리를 만들고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함으로써 유효수요를 창출한다. 케인스가 1936년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에서 이론화한 바로 그 논리를, 다산은 1818년 강진 유배지에서 행정 지침서의 형태로 서술했다. 118년의 차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산의 논리가 이미 역사적 실천의 근거 위에 서 있었다는 점이다. 영조 36년(1760년) 청계천 준설이 그 증거다. 서울에 반복되는 홍수를 막기 위해 영조가 명한 대규모 준설 공사에서 핵심은 백성의 강제 부역이 아니라 임금을 지급한 고용 노동이었다. 재원은 국가 재정의 조정으로 충당했다. 이재민과 빈민의 생계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홍수 예방 인프라를 구축했다.
정조 18년(1794년)부터 축조된 수원화성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거중기(擧重機) 등 신기술을 활용해 공기를 단축하고 인력을 절감했다. 모든 노동자에게 노임을 지급했다. 재원은 내탕금(왕실 재정)과 국가 재정 조정으로 확보했다. 백성에게 추가 부담을 지우지 않으면서 경제 활성화와 방어 인프라와 신도시 개발을 동시에 실현했다. 강제 노역이 아닌 임금 지불을 통한 유효수요 창출, 이것이 케인스가 이론화하기 1세기 반 전에 조선의 왕들이 실천한 적극재정이었다.
다산 보력론의 네 가지 효과
① 직접 고용 효과 — 흉년에 일자리 제공.
② 현장 급식 효과 — 공사 현장에서의 끼니 해결.
③ 사회 안정 효과 — 백성이 일에 종사하면 유민이 되거나 도적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④ 미래 재해 예방 효과 — 제방과 수리시설을 정비하면 다음 재해에 대비할 수 있다.
루스벨트 뉴딜의 논리 구조와 정확하게 겹친다. 재난의 악순환을 차단하는 가장 근본적인 예방 투자다.
의무로서의 재난 대응 — 200년 전 행정 지침서가 오늘 묻는 것
다산의 진황론을 관통하는 한 가지 정신이 있다.
"상사(上司)는 속일 수 있고 군부(君父)도 속일 수 있지만, 백성은 속일 수 없다."
(上司可欺,君父可欺,民不可欺也)
— 《목민심서》 진황(賑荒)
조선의 재난 대응은 시혜(施惠)가 아니었다. 자선(慈善)이 아니었다. 국가와 지방관의 의무였다. 왕은 재난 앞에 반성의 교서를 내렸다. 수령은 재난 구호를 법적 절차에 따라 집행해야 했다. 이를 속이거나 게을리하면 처벌이 따랐다.
이 의무 의식의 토대는 민본(民本) 사상이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원칙이 선언에 그치지 않고 《경국대전》의 조문으로, 전분육등·연분구등의 조세 구조로, 진황편의 구체적 행정 지침으로 새겨졌다. 다산은 그 실현 방법을 200년 전에 이미 쓰고 있었다.
4·16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는 어디 있었는가"라는 물음이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코로나19 팬데믹에서 지방자치단체의 재난 대응 역량이 시험대에 올랐다. 기후 위기로 재난의 빈도와 강도가 높아지는 시대에 지방자치단체장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다산이 2026년 지방선거에 던지는 네 가지 질문
① 재난 앞에 그 고장의 수령은 어디 있는가. 평상시 재난 대응 매뉴얼이 살아 있는가, 책상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는가.
② 흉년에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의 생계를 세우는 적극재정의 의지가 있는가. 경기 침체기에 지자체의 사회간접자본 투자가 단순한 토건 사업이 아니라 약자의 생계 안전망과 연결될 수 있는가.
③ 구호 물자 집행에서 공의(公議)를 실현하고 아전의 농간을 막을 시스템을 갖추었는가. 재난 지원금이 정작 필요한 사람에게 가는가, 행정의 손이 닿기 쉬운 곳에만 머무는가.
④ 무엇보다, 재난 대응을 시혜가 아니라 의무로 이해하는가. 의무라는 자각이 없는 곳에는 매뉴얼도 시스템도 작동하지 않는다.
200년 전 유배지에서 쓴 행정 지침서의 물음은 여전히 살아있다. 재난 대응의 수준은 그 지역 민주주의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필자: 하종삼 · 목민심서연구소 대표 · 원작 게재: 2026-05-18 · 지방자치혁신뉴스(jach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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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호는 지방자치혁신뉴스(jachinews.kr) 게재 칼럼을 그대로 큐레이션한 것입니다.
원성묵 지방자치혁신연구원 원장 · 지방자치혁신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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